기타/역사적 인물의 재조명

세계적으로 유래가없는 한국 최고의 명문가

까까마까 2012. 3. 14. 08:16

 

                                                                                                                        

 

                                                                        건국 초대 부통령의 가난한 후손들...

   손자,손녀들이 경기고,경기여고를 나왔으나 대학 진학한 자손이 하나도 없다.

 

 

 

            그 가운데 55회 이종문 동문도..6형제 독립운동, 돈보다 나라를 먼저 살려라~ 노블리스 오블리제!

 

 

 

                                  가난한 건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후손들… 며느리·손녀는 무허가 집에서 생을 보내고..  

 

 

                                                                                                                   

 

가난한 건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후손들… 며느리·손녀는 무허가 집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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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영[독립운동 헌신 초대 부통령 이시영… 그의 후손은]

이시영이 臨政 따라 떠나자 셋째·넷째아들 만주서 아사

명문고등학교 나온 손자들, 돈 없어 대학 졸업하지 못해

이시영 묘 국유지에 방치… 100세 며느리가 40년째 지켜,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일대에 애국선열의 묘(墓) 17기가 흩어져 있다.

호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남으로 300m쯤 내려오다 왼쪽 북한산 등산로 방향이다.

그 중간 중간엔 쓰러질 것 같은 무허가 집과 닭도리탕 음식점이 여럿 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副統領)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1869~ 1953)의 묘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비가 뿌리던 지난 1일 낮 찾아본 그의 묘는 한눈에 보기에도 허술했다.

뗏장이 군데군데 파여 나가 맨흙이 드러나 있었다.

 

성재의 유해는 1953년 사망한 후 서울 정릉에 임시 안치됐다. 지금 자리로 옮겨진 건 1964년이다.

그 후 47년간 나라에서 관심을 기울인 건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성재 손자의 하소연을 듣고

진입로를 다듬어준 게 유일하다.

 

건국(建國) 부통령의 묘는 올 4월 5일에도 일부가 무너졌지만 누군가 임시로 손봐놓았다.

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국립묘지가 아닌 이런 국유지에 있을까.

 

"동작동으로 옮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말석(末席)이었습니다.

 대전국립묘지로 오라는 말도 있었지만 1402년부터 서울을 지켜왔는데 그리 갈 순 없었습니다."

 

 

 

 

 

▲ 정부는 이시영 건국부통령의 묘를 방치해왔다.

이 부통령의 손자 이종문씨가 맨흙이 드러난 묘를 가리키고 있다.

문갑식 기자 성재의 손자 이종문(李鐘文·71)은 "4·19국립묘지에 이곳을 포함시키면

쉽게 풀릴 일"이라고 했다.

그는 보훈처에서 수리비를 준다는 말을 듣고 서류까지 준비해 찾아갔다가

상한액이 100만원에 불과한 걸 알고 포기한 일도 있었다.

 

이시영의 묘 아래 수유동 산127번지라는 문패가 달린 무허가 집이 있다.

규모가 12평인 이곳에서 올해 100세인 성재의 며느리 서차희(徐且喜) 여사가 살고 있다.

서씨는 한때 비닐하우스였던 여기서 시아버지 묘를 40년 넘게 돌봤다.

 

그는 지금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 여사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린 막내딸과 함께 산다.

막내딸은 장애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병을 앓고 있는 셋째 아들은 기자가 온다는 소식에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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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형제 6명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



통일신라,고려,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안 양반인 집안.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밀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첫째
[첫째 이건영, 이건영의 둘째아들 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 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가장많은돈을 보탠 둘째 이석영은 중국빈민가를 80의나이에 떠돌다 굶어죽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셋째 이철영은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모든계획에 중심에섰던 넷째 이회영은 일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고문끝에 숨짐.


이회영의 둘째아들 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꼐 밀정 암살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뒤 석방.]



다섯째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후 김구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막내
[막내 이호영은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아들 이규황,이규준도 함께 실종 (몰살당한걸로 추정)]





-이회영선생은 나라를 지키기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 안하시는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것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 많이 올랐왔던 글이지만 정리가 잘 된 것 같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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