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왕자 이야기 조선 마지막 왕자, 너무 슬픈 사연
이우왕자 이야기 조선 마지막 왕자, 너무 슬픈 사연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게재된 이우왕자 이야기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인터넷에서 화제입니다.
공개된 이우왕자 이야기는 조선 마지막 왕자로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사연이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우왕자 1912년 - 1945년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 이강과 셋째 부인 수인당 김홍인의 아들
형 이건왕자가 일본에 순응하며 친일을 하는데 반해 동생인 이우왕자는 일본을 증오했다.
( 그래서 고종과 의친왕은 이우왕자를 매우 아낌)
이우가 서울에 있을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에게 몰려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면서도 보상을 안해준다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우는 즉시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갔다. 그리고 당시 도로건설을 담당하던 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다. 담당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에 이우는 즉시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고 이 말에 일본 장군은
버로우탐.( 농민의 청원은 이루어짐)
1929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인의 길을 걷고 일본군 정보 참모까지 올라간다.
(일본인들을 싫어했기때문에 학교에서도 매일 마찰이 생겼고 일본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받게됨.
그리고 정보 참모의 직위를 이용해서 독립군들에게 수집한 정보를 넘겨주는등 독립군의 후원자로 활약함)
이우는 태원에서의 근무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알려지기도 전에 히로시마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변 증언으로 종합하여 보면,
이우는 근무지 근처에서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확장에 은밀히 간여하였다.
이우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이우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함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한국에 배속시켜 달라는 청원도 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어린 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까지 하면서 히로시마로의 배속을 늦추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이우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때 이우의 동계급 부관이며, 일본정부가 임명한 감시원이었던 요시나리는 히로시마로 갈것을 설득하여
6개월만에 이우는 일본에 가게 된다. 요시나리는 애초에 이우를 감시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는
밀정의 임무에 충실하였지만, 후에 가서는 이우의 인품과 배포에 매료되어 이우의 사람이 된 군인이다.
그런 요시나리의 설득에 이우는 운현궁을 나서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하필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게 된 날이 미국의 히로시마원폭투하
결국 이우왕자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고 호전될 것 같았는데
요시나리가 정밀 검사를 위해 일본에 요청해 도쿄병원으로 이송함
이송 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서 돌아가셨다. ( 요시나리는 이 일이 자기 책임이다. 하고 할복해서 죽음)
3줄요약
1. 의친왕과 셋째 부인 사이에서 이우왕자의 출생.
2. 농민들의 청원을 위해 일본장군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협박 ( 농민들의 청원 이루어짐. 이외에 다른 업적도 많음)
3. 히로시마에 간 첫 날 아침에 원폭에 피복된 후 운명하셨다.
아... 정말 지금 우리나라에 왕자님같으신분들이 계셔야 하는데......
정말 안타깝고 슬프네요
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차남이다. 1917년에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이 사망하자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의친왕을 닮아 일본군에 있으면서도
민족 의식이 강하였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길이며 우로 개명하였다.
사후 사시(私諡)인 흥영군에 추봉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현재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육군 중좌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서 일본 제국의 황족과 결혼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조선인과 혼인하겠다는 본인의 의지로 박영효의 서손녀(庶孫女)인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1945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8월 7일에 사망하였다.
이우왕자 이야기
흥영군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에 사동궁(寺洞宮)에서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다섯째 서자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후궁인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人)이다.
1917년 3월 22일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장손인 이준용(李埈鎔)이 사망하자
고종의 뜻에 따라 5월 28일에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운현궁(雲峴宮)의 4대 종주가 되어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다. 이준용은 자녀로 서녀(庶女) 이진완(李辰琬)만이 있었고
아들 상속자가 없어서 의친왕의 아들이었던 그를 후사로 결정하였다.
이준용은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에 공족(公族)으로 분류되어서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李載冕)의 뒤를 이어 공(公)의 칭호를 갖고 있었기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된 이후에
공위(公位)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李鍝公殿下)’로 불렸다. 당시 조선에서 공으로 불리던 인물은
이우와 의친왕 밖에 없었다. 이우의 이복 형이자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李鍵)은 의친왕이
1930년에 강제 은거를 당하자 공위(公位)를 세습 받았으며, 일본 황족과 결혼한 뒤
1947년에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개명하고 일본에 귀화하였다.
1915년에 경성유치원, 1919년에 종로소학교를 거쳐 1922년에 종로소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学習院)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
학습원을 졸업하고 1926년에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으며 1929년 4월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31년 3월 18일에 육사 예과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본과에 입교하여
1933년 7월 1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45기)를 졸업하였다. 1933년 10월 25일에 포병 소위로 임관하면서
근위 포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938년 12월 27일에 일본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941년 7월 31일에 일본육군대학(54기)을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건, 홍사익 뿐이다.
1935년 5월 3일에 일본 황족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의지와 의친왕과 박영효의 도움으로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朴贊珠)와 결혼하였다. 1936년 4월 23일에 도쿄 별저(別邸)에서 장남 이청(李淸)이 태어났고, 1
940년 11월 9일에 도쿄 별저에서 차남 이종(李淙)이 태어났다.
후반바로 일본군 육군 중위로 진급되어서 1941년에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
대위를 거쳐 같은 해 10월 15일에 소좌로 진급하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942년 3월에 일본육군대학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었다.
그 뒤 다시 육군포병학교 교도연대 중대장으로 배속되었다. 1944년 3월에 중국 산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북지나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 참모로 근무하였다. 이우가 타이위안에서 머물던 시기
태항산 유격대를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사료적 근거나 정황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1945년 6월 10일에 중좌로 진급되었으며 일본 정부에 의해 히로시마에 배속되었다.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서
장남 이청에게 관장약을 먹이면서까지 버텼다는 일화는 허구이다.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자동차가 있었지만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1]
장남 이청은 이우가 승마를 좋아했으며 자신의 엄격한 승마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하였다.[19]
그 날 저녁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相生橋)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되었고
즉시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似島)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사망한다. 8월 8일에 유해가 비행기에 실려 운현궁으로 운구되어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되었다.
일본인 수행 무관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중좌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하여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해서 피폭을 면하였다.
그러나 부관으로 이우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유해를 운구한 날 밤에 자살하였다.
1945년 8월 13일에 육군 대좌로 진급 추서되었다.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12시에
경성운동장(현재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옥음방송) 때문에 연기되어 오후 3시에 거행되었다.
조선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이었다.
장례식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上月良夫), 천황 대리로서
궁내부 식부 차장 호죠 토시나가(坊城俊良)가 참석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의 흥선대원군 묘역에 묻혔다.
사후 황족의 예에 따라 흥영군(興永君)에 추봉되었으나 정식 시호는 아니며 사시(私諡)이다.
인터넷상에서 준수한 외모로 얼짱 왕자, 비운의 왕자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우가 일본 제국 육군 중좌까지 지냈고 일본 황족으로 대우 받은 점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동기생인 일본의 황족 아사카 타케히코(朝香孚彦/朝香宮孚彦王, 1912년 ~ 1994년)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22]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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