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ㅂㄷ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묘사된 운현궁 예식장
[백척간두(百尺竿頭)] 5
......
"어머나! 창경원 안에 수정궁이라는 게 있니!"
오선영여사는 수정궁이라는 말에서 화려한 궁전을 연상하며 물어보았다.
"창경원 식물원에 커다란 연못이 있지 않아!"
"그래, 있어!"
"그 연못가에 커다란 건물이 있지, 왜! 그게 바로 수정궁이야,
옛날에는 임금님께서 달구경 물구경을 하시려고 행차하시던 곳이야."
"거기서 파아티를 열 수 있나!"
"아이참, 선영이는 정말 소식불통이구나. 돈만주면 어딘선들 파아티를 못 열 줄 알아!"
"그래도 옛날에는 임금님이 행차하시던 곳인데, 감히 그런데서 어떻게......"
"흥! 선영이는 그 점이 틀렸다는 거야. 아무리 봉건시대에는 임금님만이 행차하시던 궁전이기로,
민주주의 시대에는 우리가 국가의 주인인데,
어디를 거거나 황송하게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냐 말야!
덕수궁이나 운현궁(雲峴宮) 같은 유서 깊은 궁전이 오늘날에는 결혼식장으로 변한 것만 보아도
시대변천을 알 수 있잖어!
선영이도 빨리 머리를 개조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같이 다니기가 부끄럽겠는걸! 호호호."
"아니 망할것! 누구를 정말 시골뜨기로 아는가 보구나!"
......
[사면초가(四面楚歌)] 3
......
흘러간 사랑을 회상한들 무슨 소용이리요마는 박은미와 함께 밤거리를 거닐던 때와 같이 행복스러웠던 시간이
이제 앞으로 또다시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내만 없었던들 ......)
예전에도 박은미를 영리한 여자라고는 생각햇지만,
더구나 요즈음의 아내와 비교해 볼 때 여성으로서의 그의 가치는 무한히 빛나보였다.
"후우ㅡㅡ" 장태연교수는 세번째의 한숨을 쉬었다.
결혼날짜를 보니, 시일과 장소는 내일 오전 열한시 운현궁 예식부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에는 참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하던 여자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일 상 싶었다.
......
[해설] 정비석(鄭飛石)의 <자유부인(自由夫人)>이 <서울신문>에 연재된 것이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215회였고,
소설상의 배경시점이 1953년 가을부터 1954년 초여름까지 이므로
적어도 1953년 이전부터 이미 운현궁에 예식장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리 : 2006.10.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관련자료 1]
▲ <동아일보> 1968년 2월 12일자
빚더미에 밀린 한말풍운(韓末風雲)의 터전
"운현궁(雲峴宮)"에
일대사관(日大使館)
<동아일보> 1968년 2월 12일자
1억 5천만 원에 팔아
전격(電擊) 가(假)계약, 외무부(外務部)
협조로 본계약(本契約) 서둘러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했던 운현궁(雲峴宮) 자리에 주한 일본(日本)대사관이 들어서게 된다.
12일 운현궁관리소는 운현궁 뒤뜰의 대지 9백30평을 주한 일본대사관에 1억 5천만 원에 매각키로 결정,
작년말 이미 가계약까지 마쳤다고 밝혔다.
운현궁의 내력
운현궁의 '운현(雲峴)'이란 서운관(書雲觀, 지금의 휘문중학교) 앞에 있었던 고개의 이름이며
고종(高宗)의 본궁(本宮)이며 운현이 있었기 때문에 통칭된 이름이다.
고종(高宗)이
등극한 후 경근문(敬覲門)과 공근문(恭覲門)을 세웠고 운현궁의 경내 및 근처엔
그 선조인 은신군(恩信君)과 남연군(南延君)의 묘소가 있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운현궁은 그의 잠저처(潛邸處)였고 아버지 대원군(大院君)의 거처였으므로 자주 내왕했다.
고종 3년에는 이곳에서 민비(閔妃)와 가례를 올렸고
광무(光武) 2년 (서기 1898년) 대원군과 그 부인이 별세하자
이곳에 예장청(禮葬廳)을 설치했으며 그후엔 대원군의 맏아들 흥친왕(興親王) 이재면이 관리를
계승했다.
흥친왕에게는 아들 이준이 있었는데 1911년(1912년의 착오)에 흥친왕이 죽은 후 6, 7년후
이준이 후사없이 별세함으로써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씨가 계승했다.
이우씨는 제2차세계대전시 일본육군중장으로 광도(廣島,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되고
운현궁엔 그 부인 박찬주(朴贊珠) 여사가 현재 흥친왕비와 함께 살고 있다.
팔리게 된
땅은 운현궁예식장터와 그 뒤뜰을 합친 구백삼십평으로 대원군이 거처했던 노안당(老安堂, 큰사랑),
영선군(永宣君)이 거처했던 이로당(二老堂, 작은 사랑), 대원군의 큰 며느리 흥친왕비(興親王妃)가 현재 살고 있는
노락당(老樂堂, 안방)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운현궁관리소는 "이 땅을
팔게 된 것은 운현궁에서 지고 있는 은행빚 사천만 원을 갚지 못해
이땅이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운현궁은 모란(牧蘭)공원묘지 조성비 때문에
빌려쓴 제일은행의 빚 사천만 원 등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이자만도 매달 2백만 원씩 물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땅을 내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땅이 일본대사관에 팔리게 된 것은 작년말 일본대사관의 '이와다'참사관이 동대지를
빌리러 왔다가
매입할 의사를 표명, 작년 12월말 전격적으로 가계약을 맺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가계약조건은 외국인토지매매법에 의거, 대사관이 정부의 승낙서를 받아왔을 때 본계약을 맺도록 되어 있는데
현재 일본대사관은 외무부의 협조로 내무, 국방, 상공 당국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중이며
이달말께 본계약을 맺도록 서두르고 있다.
운현궁이 있는 경운동, 재동, 교동 일대의 땅은 평당 15만 원으로 이 운현궁 땅값은 1억 5천만
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운현궁관리인 김택수(金澤洙)씨는
"이번 토지매각이 대원군이 집정했던 자리라는 데서 뜻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르겠으나
국내에서는 이 땅을 팔려해도 살만한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아 일본대사관에 팔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운현궁에서는 이 땅을 매각한 뒤 사천만 원의 은행빚을 갚고 나머지는 모란공원묘지에 투자할 방침이다.
외무부(外務部)선 "검토중(檢討中)"
<> 외무부 관계자의 말
= 일본대사관으로부터 신고를 받아 현재 관계요로에 조회하는 등 검토중에 있다.
이를 승인할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짓지 않았다.
[사진설명 : 일본대사관이 세워질 운현궁 뒷동산 -
앞의 건물이 운현궁예식장]
▲ <조선일보> 1968년 2월 13일자
운현궁(雲峴宮)이 팔린다
은행(銀行)빚에 눌려, 일대사관(日大使館)과
가계약(假契約)
<조선일보> 1968년 2월 13일자
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종로구 경운동) 뒤뜰에 일본대사관이 들어설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대사관 건축후보지를 찾던 일본대사관은 지난 12월 운현궁 예식장터와 뒤뜰 9백30여평을 매입키로 결정,
운현궁관리소측과 가계약을 맺은 것으로 12일 알려졌다. 운현궁이 팔리게 된 것은
제일은행의 빚 4천만원을 갚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토지매매법은 정부의
승낙서가 있어야 본계약을 맺을 수 잇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일본대사관은 이달말까지 본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외무부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운현궁관리소 김택수(金澤洙)씨는 운현궁이 제일은행에서 빌어 쓴 4천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매각결정을 했다고 밝히고,
빚을 갚고 남는 돈은 모란공원묘지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이 일대의 땅값은 평당 15만원으로 호가돼 9백30평 매각으로 운현궁은 약 1억4천만 원의
수입이 있게 된다.
<>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의전실장의 말 = 일본대사관이 공식으로 신청해온 것은 아니나,
대사관 건축후보지로 운현궁이 어떻겠느냐고 의사타진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현재 외무부는 승인여부에 관해 국방부와 협의중이다.
[사진설명 : 일본대사관이 들어서게 될 운현궁 뒤뜰]
---------------------------------------------------------------------------------
풍운(風雲) 안은 운현궁(雲峴宮)
<경향신문> 1968년 2월 13일자
대원군(大院君)이 살고
민비가례(閔妃嘉禮) 치룬 터
일(日), 930평(坪) 사겠다 흥정
결혼식장(結婚式場) 등 안돼
빚몰려
대원군(大院君)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의 일부가 빚에 몰려 팔리게 됐다.
이중 옛 운현궁의 뒷동산 9백30평을 일본대사관이 사겠다고 관리소 측과 말이 오가고 있다.
대원군이 이곳에서 집정한지 1백4년, 한말풍운사가이던 운현궁은 또 한번 기구한 운명을 지켜보고 있다.
대원군이 지금 운현궁을 지켰을 때의 집터는 모두 8천여 평, 해방후 덕성(德成)여대가 들어섰고
현재는 노안당(老安堂, 사랑), 노락당(老樂堂, 안채), 이로당(二老堂, 작은 사랑)이 남아 있는
운니동 114의 10번지와 운니동 98의 77 6○에 있는 옛 운현궁예식장,
동원(東苑)영화사 건물 등 3천여평만이 남아 있다.
이중 빚에 몰려 세놓은 것 중 일본대사관이 모두 사겠다는 땅은 98번지 9백30평으로
옛 운현궁의 뒷동산, 현재 문을 닫은 예식장과 짓다만 영화사 3층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대사관은 지난해 12월 참사관 ○전(○田, 이와다)씨가 이 땅을 한평에 15만원씩에 사겠다는 의사를 정한 후
외무부를 통해 우리 나라 내무, 국방, ○○당국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
"은행빚 4천만원을 갚기 위해 궁의 일부를 팔게됐지만 본채가 있는 곳은 영구보존될
것입니다.
" 해방 이듬해부터 운현궁을 관리해 왔다는 김택수(金澤洙)씨
(75, 대원군(大院君)의 장남 흥친왕(興親王)의 조카사위)
는 이렇게 말하면서 궁터를 팔게된 이유를 밝힌다.
3년 전 동원영화사가 망할 때 운현궁측에서 3층건물을 2천8백만원에 경락(競落)시켰고
그후 ○○○○○○
20만평에 달하는 모란(牧蘭)공원묘지의 설비 때문에 계속 은행빚이 늘어왔다는 것.
또 언제부터인가 "운현궁터가 세다"는 말이
시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택수씨는 "그래서 땅을 팔려고 내놔도 우리 나라
사람은 사려하지 않는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고 한(韓)모씨가 경영하던 운현궁예식장은 10년전에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면 짝을 잃는다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아
예식실을 찾는
이가 차차 줄어들어 예식장붐이 일어나던 때 문을 닫기도 했던 것--.
이곳에서 결혼식을 한 최초의 부부는 고종(高宗)황제.
1867년 노락당(老樂堂)에서 고종과 혼례를 올린 민비(閔妃)는
일본인에 의해 참사를 당했다.
김진문(金軫文)씨가 경영하던 동원(東苑)영화사는 3년 전 3층집을 다 짓지도 못한 채 빚에 넘어갔다.
운현궁 주인장들의 운명도 기구하기만 하다. 대원군(大院君)의 손자 이준(李埈,
永宣君)이
1918년(1917년의 잘못) 후손 없이 숨진 후
양자로 온 의친왕(義親王)의 2남 이우(李우)씨(朴贊珠씨의 남편)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숨졌고,
그의 2남 이종(李淙)씨는 66년 12월 미국유학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렇듯 파란이
겹친 운현궁은 본래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과 함께 살던 집.
고종이 즉위한 후(1864년)부터 운현궁(雲峴宮)이라 불렀다.
운현(雲峴)이란 현재
휘문중고교~교동국민교 사이의 옛고개길의 이름.
대원군은 이 집에서 섭정, 1898년 별세하기까지 한말역사가 이곳에서 비롯됐다.
현재 운현궁에는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李載冕, 興親王)의 부인 이(李)씨(85)가 살고 있고
대원군의 종손부 박찬주(朴贊珠)여사(55)가 법적인 소유권자,
도미중인 그의 장남 이청(李淸)씨(33)가 유일한 상속자로 되어 있다. <재(載)>
----------------------------------------------------
---------------------------
▲ <동아일보> 1968년 2월 15일자 (본문 내용은 별도 파일에서 정리되어 있음)
[관련자료 2]
▲ <서울육백년사> 제3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79) 26쪽에 수록된 운현궁이 모습이다.
담장에 '운형궁예식장'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운현궁예식장이 있는 쪽에서 촬영한 모습인 듯하다.
그런데 사진 속의 왼쪽 끝에 보이는 출입문은 김영상 선생의 <서울육백년사; 제3편. 창덕궁, 창경궁, 응봉기슭>
(대학당, 1997) 358쪽에 수록된 사진자료와 비교해보면 운현궁을 지을 때
창덕궁과 가까운 북쪽 담장에 고종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경근문(敬覲門)'으로 확인된다.
'문화와 예술 > 한국의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내리는 경주 양동마을 (0) | 2012.09.15 |
---|---|
고화질로 찍은 독도사진 (0) | 2012.08.11 |
탐방]관악산 둘레길 3구간~난곡능선 | ♤--문화산책로 (0) | 2012.05.22 |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속편 (0) | 2012.04.28 |
북촌 한옥마을 순례 (0) | 201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