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의 "TE DEUM"을 올렸습니다.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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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선
2012년 12월19일 치러진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타전하는 외신들은 한국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다뤘다.
다만 영미권 외신 상당수가 박근혜 당선인의 배경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일본 언론은 한국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점을 집중
조명했다.
중국 언론은 선거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
英·美 언론 “독재자의 딸 대선 승리” 앞다퉈 전해
영미권 외신은 기사 제목과 머리말을 통해 박근혜 당선인이 18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뉴욕타임스(NYT)는
“독재자의 딸 대통령 선거 승리(Daughter of dictator wins South Korea
presidency)”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이 경제 발전과 정치적 억압이라는 유물을 동시에 남겨 한국의 여론이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AP도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독재자 아버지의 그림자가 승리를 덮고 있다
(Park Geun-Hye Elected South
Korea President, But Dictator Father Looms Over Win)”는 제목의 기사로
대선 결과를 타전했다.
다만 워싱턴포스트(WP)는
“권위적인(authoritarian) 아버지를 둔 박근혜 후보자가
경기 둔화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진
가운데 대통령에 당선됐다”고만 전했다.
영국 언론도 박 당선인의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영국 유력 매체인 가디언과 BBC은 이날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펼친 독재자의 딸이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에서 경쟁자를 제쳤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이번 대선이 양 후보자의 배경에 대한 투표가 됐다고 평가했다.
WP는 “한국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공약은 거의
비슷했다”면서
“대선 레이스가 두 후보의 배경에 대한 투표가 됐다”고 보도했다.
BBC 역시 “두 후보간 공약이 거의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 올해엔 한국은행이 예상하는 성장률이 2.4%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약속했던 7% 성장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BBC도 “최근 몇년 동안 평균 5.5% 성장을 기록해 온 한국의 성장률은
올해 2%대를 기록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박 당선인이 헤쳐가야 할 가장 큰 과제로는 경제성장 회복을 꼽았다.
WP는 “한국은 전 세계 15번째 경제 대국으로
분열된 여론 수습도 과제로 지적했다. AP는 이번 선거에서 50대 이상 고령층과
민주화 투쟁을 벌인 40대 이하 층의 표심이 엇갈린 것을
지적하며 “18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 분열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박 당선인의 가장 큰 과제”라고 분석했다.
◆ 日 언론들 “얼어붙은 한·일 관계 개선 기대”
일본 언론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보수파의 재집권으로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악화된 양국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니혼게이자이, 요미우리 등 주요 일본 언론은 박근혜 당선인을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는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을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라고 소개하면서
“보수와 중·노년층 등 강력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그가 앞으로 성장 유지와 소득 격차 조정이라는
두 가지 무거운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문은 "한국
국민은 보수 정권의 지속을 선택했지만,
소득 격차 확대에 대한 불만은 강하다"며 "새 정부가 고용 보장 등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않으면
다시 재벌 개혁에 대한 압력이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박 당선인은 일본을 '중요한 우방'으로 언급하며 한일 경제 연대 협정(EPA) 협상 재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줬다"고 했고, 요미우리신문도 "박 당선인이 선거전 당시 한일 관계에 대해 '미래 지향'을 호소한 바 있고, 협상이 중단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생각을 나타냈었다"고 전했다.
다만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박 후보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박 당선인은 지난달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독도는 우리 고유의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한국의 새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함께 강경한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박 당선인의 대북 정책도
북측의 도발에 대해 강한 자세로 임하겠다는 입장"이라며
"일본 외무성 간부가 북한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 발사 문제로
한국과의 협력 진행이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 中 “양분된 정치여론 극복 과제…네거티브 선거전 눈살”
중화권 언론들은 박근혜 후보가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는 점을 비중있게 다뤘지만,
선거 과정이 깨끗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1987년 대한민국에 민주 투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과반이 넘는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면서
“박 당선인의 지지자가 대선 승리를 ‘한국 여성의 승리’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보수·진보로 양분된 정치 여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과제로 꼽았다.
통신은 “한국의 뿌리깊은 지역 감정 때문에 보수·진보로 여론이
양분됐다”고 분석했다.
또 “유세
과정에서 새누리당은 상대편 문재인 후보의 TV광고에서 값비싼 의자가 나온 것을 비난했고,
민주당은 박 당선인이 토론 중 아이패드를
소지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며
‘네거티브 선거전’ 때문에 선거 과정이 얼룩졌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당선인은
1979년 11월 28살 당시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나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다시 청와대의 주인자리를 예약했다. 대통령의 큰 딸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20대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으나 부모를 잃었던 집으로 대통령의 신분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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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근혜, 근영(현재 이름은 서영),
지만씨(오른쪽부터) 남매가 눈이 쌓인 청와대 뒤뜰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놀면서 사진을 찍었다.<조선DB>
◆
냉정하고 위엄이 엿보인 아이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박근혜 가족은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옮겨다니다 1958년 신당동에 있는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 당선인은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를 보면 ‘온순하고 침착하나 차근차근하며 실수가 별로 없음. 남에게 호감을 받으나 특정한 아동들과만 노는 습관이
있음’이라고 적혀있다. 또 4학년때는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며 굳게 다물어진 입가에는 위엄이 엿보임’이라고 평가됐다.
박 당선인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1년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박 당선인과 동생 근령(박서영으로 개명)은 신당동 집에 따로 살았다.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통학하면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했던 어머니 육영수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1학년 때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2학년부터는 청와대에서 전차로 통학했다. 그는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맡았고 줄곧 반에서 1등을 했다. 당시 검사한 지능지수는 127이다. 박 당선인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타고 통학한다는 소문이 돌자 전차 차장이 성신여중 배지를 단 박근혜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고 묻자 “글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성심여중에 이어 성심여고에 진학한 박 당선인은 줄곧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 육영수는 역사학과를 희망했지만 본인이 ‘산업 역군이 되고 싶다’며
전자공학과에 지원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올해 초 출연한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서 "대학교 때 본받고 싶은,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서강대에 재학중이던 1972년 박 전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추진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반 정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 와중에 데모하다 퇴교당한 과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들은 박 당선인은 어머니에게 부탁해 취직하고 복교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학 4년 성적은 4점 만점에 3.82로 수석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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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에 담긴 박 후보의 예전모습. "한 나라의 외교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맺은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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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퍼스트레이디와 은둔생활.
대학 졸업 후 박 당선인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6개월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어머니 육영수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서거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22세의 박근혜는 어머니를 대신해 5년동안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맡아 공식 행사에 참석하고
외국사절을 영접했다. 당시 박 당선인의
일기에는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고 적혀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그는 아침식사 때
중앙정보부의 일일 특별보고를 아버지와 함께 읽으며
현안에 대해 아버지와 토론했다. 박 당선인은 당시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분쯤 박 당선인은 전화 한통을 받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했다.
9일간의 국상을 치룬 그는
1979년11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당시 짐은 트렁크 6개가 전부였다.
이때부터 박 당선인의 은둔과 인고의 세월이 시작된다. 박 당선인은 1981년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다.
마음을 잡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 학기만에 그만둔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영남대재단 이사(1980~1988년)와 육영재단
이사장(1982~1990년)을 맡았지만
사실상 은둔의 시기를 보냈다. 당시 5공화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을 펼쳤고
그는
아버지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봐야 했다.
은둔의 시절을 보내던 박 당선인은 5공이 끝나자 19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박정희 1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치르기도 했다. 그해 박 당선인은 일기에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라고 썼다.
그러나 1990년부터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어린이 회관 고문인 최태민 목사가 각종 전횡을 일삼는다”며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사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줬다.
40대로 접어들면서 박 당선인은 정치권으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조용히 사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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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4년 3월 25일 공동선대위원장에 내정된 박세일 교수의
입당환영식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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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정당 최고의 소방수
1998년 4월 재보선 때 대구 달성에서 당선된 박 당선인은
15년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며
최고의 ‘소방수’ 역할을 했다.
2004년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 대표가 돼 총선을 지휘한다.
당시 한나라당은 ‘차떼기’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50석도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가 되자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등 승부수를 던지며 121석을 얻어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는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당시 의사는 “1cm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지만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은 그의 첫 말은
“대전은요?”였다. 그는 2006년 6월까지 한나라당 대표로 있으면서
모든 선거에 승리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기간 동안 당시 여당은 8명의 대표를 갈아치워야 했다.
그러나 2007년 대선 도전에서는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밀리며 고배를 마셨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당시 박 당선인은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5년 후를 약속하게 된다.
이 때부터 5년 넘게 일명 박근혜 대세론을 끌어왔다.
대통령이 된 이명박 후보는 박 당선자를 "국정의 동반자로 대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당 운영은 친이계가 독점했고 결국 5년내내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다.
그는 정치 시작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반대 연설까지 하며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이 때부터 박 당선자 앞에 신뢰와 약속이라는 키워드가 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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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제18대 대통령선거 이틀을 앞둔 17일 오후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거리 유세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전기병기자
2011년 12월 박 당선인은 다시 한번 소방수로 올라선다. 그해 10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4년 3개월동안 유지하던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지난 4월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다시 한번 선거의 여왕임을 입증했다. 지난 8월 주요 정당 최초로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동북아 정세 급변과 세계 경제 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여성 최초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