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훌륭하고 유익한 기사(논문)이니 꼭 보세요.
-5회에 걸쳐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좀 길고 지루하더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일밑에올린 동영상은 비위가 약하신 분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운명을 거부한 부대 [ 1 ]
가장 쉬운 승리 방법
두말할 필요 없지만 전투를 수행하는 모든 지휘관들은 승리를 원합니다.
승리라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자면 적을 물리치는 것인데,
이런 단순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이를 작전이라고 하는데, 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수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중을 기하여 진행하여야하고 때로는 임기응변적으로 변화를 줄 필요도 있는 고도의 행위입니다.
[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
하지만 작전을 아무리 잘 수립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나 전투는 항상 상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하더라고 상대가 나보다 더 뛰어난 준비를 하였다면
승리를 거두기는 힘듭니다. 반대로 나의 준비가 부족하여도 상대가 더 허술하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역사의 법칙입니다.
[ 공고한 마지노선도 결국 더 뛰어난 작전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
전쟁이 인류의 시작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역사에는 승리를 얻기 위해 시도하였던 수많은 작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세월이 아무리 지나고 전쟁의 환경이 바뀐 현재까지도
확실하게 적을 제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포위'입니다. ( 관련글 참조 )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상대를 포위망 안에 가두는데 성공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역사적인 전투들의 예를 봐도 그렇습니다.
[ 기동 포위전의 모범인 탄넨베르크 전투 ]
포위를 성공하였다는 것은 상대의 퇴로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의 전쟁도 그러하였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전쟁의 양상이 거대한 물량전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포위를 당한 쪽의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선이 절단당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승리는 고사하고 포위망 안에서 저항하며 버틸 수 있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 포위당하여 저항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
때문에 포위당한 측은 항복 아니면 몰살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고 이를 뒤집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많지는 않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불굴의 의지로 포위를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은 경우도 있는데
612년 '안시성 전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안시성을 포위하였던 당(唐)도 멀리서 원정을 왔기 때문에
장기간 포위망을 유지하기는 곤란하였습니다.
[ 안시성 혈전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드라마 묘사 장면) ]
안시성 전투는 한마디로 특별한 외부의 도움 없이
누가 더 오래 버티나하는 인내의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포위를 당한 측에서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는 방법은 포위망을 뚫어
포위망 밖의 우군과 연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포위된 군대가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나가기는
물리적으로 힘들고 대개 외부의 증원군이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올 경우에 성공 확률이 큽니다.
[ 포위 된 독일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항전을 계속할 수 있던
동기 중 하나가 구출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
어떻게 생각한다면 비록 항복을 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 제6군이
처절하게 항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구출에 대한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명령에 따라 후퇴하지 못하고 현지 사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군들은 조만간 구출하여주겠다는 총통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실제로 만슈타인이 지휘하던 돈집단군이 35km 밖까지 진군하여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 10개월간 4번이나 포위를 당하고도 살아난 부대가 전사에 있습니다 ]
하지만 고립된 독일군들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처절한 저항을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처럼 전투 중 포위당한 쪽은 생존이 위태로운 위기이며
전세를 반전시키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10개월간 4번의 포위를 당하고도
기적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오히려 복수극을 연출한 부대가 있습니다.
다음은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august 의 軍史世界
운명을 거부한 부대 [ 2 ]
모두를 놀라게 만든 빠른 참전
그런데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엄청난 일이 곧바로 벌어지게 되었는데,
[ 스미스 특임대 참전 기념비 ]
최근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빠른 미국의 개입을
[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었고 이 때문에 침략자들은 남침을 하더라도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오판하였습니다 ]
[ 개전 초 북괴군의 전력은 국군을 압도하였습니다 ]
이처럼 미군의 즉시 참전은 최근 종북세력들이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원흉이라 공개적으로 분통해 할 만큼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물론 한반도의 분단에 소련과 더불어 미국도 분명히 책임이 많으며 따라서 미국의 참전은 병 주고 약도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고 미군의 참전이 적화통일을 방해하였다고 분통해 하는 자들의 어이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 어이없게도 종북 세력들의 궤변이 공공연히 주장 될 만큼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려 내려갔습니다. UN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한 방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을 구상하였던 것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당시였을 정도로 빨랐는데, 7월 중 실시 예정으로 블루하트(Blue Heart) 작전을 입안하였을 정도였습니다.
[ 맥아더가 한강 변 시찰 당시에 인천상륙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하지만 공산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고 반면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미군의 준비가 너무 부족하여 작전은 연기되었습니다. 블루하트계획 당시 상륙군으로 예정되었던 부대가 미 1기병사단이었는데 경부축선에서 공산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로 계획된 미 24사단이 오산, 천안, 대전, 금강으로 후퇴하며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자 예정을 바꾸어 7월말 영일만을 통하여 전선에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 낙동강 전투 당시의 미 1기병사단 부상병 ]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한 맥아더는 블루하트계획을 대신하여 실시시기를 9월 중순으로 늦춘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을 계획하였고 본토에서 긴급 동원되어 한국으로 이동 중에 있던 미 2사단과 미 해병 1임시여단을 상륙부대로 낙점하였습니다. 하지만 호남 지역이 북괴군에게 돌파당하며 전선이 낙동강으로 축소되자 이들 부대는 곧바로 낙동강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 1950년 7월 미 2사단의 한국 주둔이 개시되었습니다 ]
원 주둔지인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Ft. Lewis)를 떠나 선도 부대가 7월 23일 부산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8월 24일 사단 전체가 한국으로 이동 전개한 미 2사단도 이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원래 종전이 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예정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적에게 무려 4번이나 포위당하였고 그때마다 격전을 치루고 살아났는데, 이런 인연 때문인지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하는 부대가 되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편집과 음악=씨밀래 출처=항상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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