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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전쟁 방어에 성공한 이유 (운명을 거부한 부대 3, 4)

까까마까 2013. 7. 1. 16:23

 

 

 

 

아주 훌륭하고 유익한 기사(논문)이니 꼭 보세요.

 

 

 

 

 

-5회에 걸쳐 보내드릴 계획입니다.

좀 길고 지루하더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일밑에올린 동영상은 비위가 약하신 분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운명을 거부한 부대 [ 3 ]

 

 

august 의 軍史世界

 

운명을 거부한 부대 [ 3 ]

 

 

긴박했던 전개

 

미 2사단이 한국에 이동 전개를 마친 1950년 8월말은 피아가 흘린 피로

낙동강 교두보가 붉게 물들어가면서 공방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이었습니다.

미 2사단은 배에 올라 미국에서 출항할 때만 하더라도 인천상륙 작전에 투입할 부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워낙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태평양 횡단 중에 낙동강 방어에 투입되도록

조정되었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전선으로 이동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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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부대로 예정 된 미 2사단은

급박한 낙동강방어선에 투입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미군) ]

 

당시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워커 미 8군사령관에게 미 2사단의 적시 증원은

천군만마와 같은 힘을 안겨주었습니다. 다부동, 포항, 안강, 마산 등 낙동강 교두보 곳곳을 돌아가며

계속하여 이어진 북괴군의 8월 공세 당시에 때마침 도착한 미 2사단은

미 8군의 유일 예비가 되어 부대를 정비한 후, 가장 피로도가 높아 당장 부대 재편이 요구되던

미 24사단을 대신하여 현풍-영산일대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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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사단 도착 당시에 낙동강 혈전은 최고조에 달하였습니다 ]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좌측에 해당되는 곳으로 워커는 미 9군단이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는데

미 2사단은 마산 지역 방어에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주었던 미 25사단과 함께

미 9군단 예하 부대로 편제되어 방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

미 10군단이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서울과 수원으로 진군하여 들어가자

 미 8군도 마침내 낙동강 교두보를 박차고 나와 북으로 치고 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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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말 드디어 아군은 반격에 나섭니다 ]

 

당시 미 8군은 다음과 같은 네 방향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는데 국군 1군단이 동해축선,

국군 2군단이 영서지방, 미 1군단이 경부가도,

미 9군단이 호남지방으로 각각 나누어 공격하여 들어갔습니다.

그중에서도 주공을 맞은 미 1군단은 경부축선을 따라 서울로 진격하여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고 미 2사단이 속한 미 9군단의 섹터는 호남,

충청 일대였는데 구조적으로 2선인 후방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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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의 반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따라서 10월초가 되어 대부분의 부대가 38선을 통과하여 북진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미 2사단은 후방의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아군의 반격 속도가 워낙 전광석화 같아서 후퇴하지 못한 많은 북괴군이 뿔뿔이 쪼개져

산악 지대로 스며들어 게릴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후방의 안전을 위해 이의 소탕도 중요한 임무가 되었는데

일단 이를 미 9군단이 담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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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 초기에 미 9군단은 주로 후방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달려간 이후

거의 모든 아군 부대들은 한만국경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진격이 늦었던 미 9군단도 국군과 경찰에게 38선 이남의 후방 작전 지역을 인계한 후,

후속하여 북진의 대열에 동참하려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미 9군단은 38선 이북으로 올라가 다시 한 번 후방작전을 펼칠 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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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선의 변화와 함께 미 2사단도 38선 이북으로 이동합니다 ]

 

비록 소련이나 중공의 참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일부 우려도 있었지만

맥아더를 비롯한 대다수의 UN군 지휘부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종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지휘부는 본국에 병력이나 보급물량을 서서히 줄여줄 것을 요청하였고

종전이 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당시에 가장 후방에 있던 미 2사단을

우선 낙점하여 놓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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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숙천 일대에서 벌어진 공수작전
이때까지만 해도 종전은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

 

사실 태평양을 건너 남의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던 수많은 미군 병사들은

전쟁을 하루 속히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당연히 소원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때까지 전황은 모두의 바람대로 그렇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짧은 북한의 가을이 끝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고,

피하고 싶었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운명을 거부한 부대 [ 4 ]

 

 

 

첫 번째 포위

 

예상과 달리 변변한 저항 없이 10월 19일 평양이 쉽게 점령되고

북괴군의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추정하던 청천강까지 UN군이 밀고 올라가자

전쟁은 쉽게 끝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타난 중공군으로 인하여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으로 각개 약진하던 아군 부대들이 격파되면서 짧았던

북진을 마감하게 되었고 눈물의 후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순식간 아군의 존립을 걱정할 상황으로 전황이 급반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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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은 순식간 바뀌었습니다 ]

 

선두를 달려가던 국군 6사단은 압록강에 손을 담그자마자 중장비를 유기한 체

연대별로 쪼개져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바빴고 ( 관련글 참조 )

 평양 선점 당시에 국군 1사단과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미 1기병사단도

부대의 절반이 붕괴되는 엄청난 출혈을 입고 중공군의 사정권에서 겨우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후퇴직전에 북위 39도선 일대에서 서에서 동으로 도열한 아군은

미 1군단, 국군 2군단,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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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공세로 전선은 순식간 청천강 일대로 밀려났습니다 ]

 

모든 부대가 중공군의 압박을 받았는데,

특히 서부전선 미 8군 관할지역에 대한 공세가 거셌습니다.

전선 중앙을 담당하던 국군 2군단이 적의 공세에 순식간 녹아내리면서

이곳을 관통한 중공군이 일로 남진하여 원산을 점령하여버리자

함경도로 진격한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고립되어 해상을 통한 탈출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후방에 있던 미 9군단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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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파구를 메우려 미 9군단이 이동하였습니다 ]

 

그렇지만 단지 밀려 내려오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서였지,

미 9군단의 증원만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중공군을 막아낼 수 있던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한 형국이었는데, 그동안 잘못된 북진 방법을 선택한 아군의 오판도

이런 상황을 초래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미 9군단은 일단 국군 2군단의 붕괴로 생긴 돌파구를 메워서 미 8군 본진이

청천강 일대에서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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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2사단은 미 8군의 후퇴를 엄호하였습니다 ]

 

이때 투입된 미 2사단은 청천강 전투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미 8군이 평양으로

안전하게 후퇴하도록 청천강 우익인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에 남아 후퇴로를 엄호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8군의 주력인 미 1군단이 청천강을 안전하게 건너서 숙천과

안주 일대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자 1950년 11월 24일,

미 2사단도 군우리에서 순천을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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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향한 미 2사단 퇴각로 ]

 

이때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갈 수 있는 도로는 직접 가는 길과 숙천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한 사단장 카이저(Laurence B. Keiser) 소장은 미 1군단장 밀번의 조언과 달리

좀 더 빨리 후퇴하기 위해 직진로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런데 문제는 선택한 길이 숙천 우회로에 비하여 상당한 험로여서 말이 도로지

계곡 사이에 자연적으로 난 좁은 산길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통로를 미 2사단은 종대로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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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급습이 개시되었습니다 ]

 

물론 수색대를 먼저 보내 철수로의 안전을 확인하고 일부 소규모 교전도 있었지만

후퇴만 생각하던 미 2사단은 퇴각로가 안전하다고 단정하고 대강의 준비를 마치자

군우리를 연대별로 순천을 향한 후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군우리-순천 간 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는

이미 중공군 42군이 은밀히 선점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미 2사단이 협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도로 앞뒤가 중공군에게 순식간 차단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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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우리 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 2사단 장병 ]

 

그리고 협곡 양쪽의 산위에 포진하고 중공군의 화력이 계곡아래에

고스란히 노출된 미 2사단을 향하여 난사되기 시작하였고

숨을 곳이 없었던 장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선택할 방법은 포탄과 총알의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미군 역사에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군우리 전투'가 시작된의 軍史世界 ] 것이었고

이것이 한반도에서 미 2사단이 당한 첫 번째 포위였습니다. ( 계속 ) [ august

 

 

지난 10년간 금지되었던 痛恨의 "6.25의 노래"

 

 

 

 

 

 

 

 

 

 

10년간 금지되었던 곡 "6.25의 노래"

 

 

 

 

 

 

 

 

6.25의 노래 -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1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편집과 음악=씨밀래

일부출처=웃음과 즐거움이 항상 있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