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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妻弟 고영숙 부부, 미국으로 망명 秘話-뜻밖의 정권교체설

까까마까 2013. 11. 26. 18:18

 

 

 

관리차원에서  들어와 보니 모란봉 악단의 동영상이 해제됬군요.

래서 좀더 건전하게 부르는 "배우자"란 곡을 넣었습니다.

처음에 삽입한 곡 보다는 파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쌈박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급 듣고 계신 이 음악을 밑으로 내려가서

동영상을 보시면 정말 놀라실 것 입니다.수준급의 연주와 

화려한 무대며 편곡도 잘 되있고 전곡을 다 외워서 하는

성의를 생각해서 거슬리는 "사회주의"찬양을 삭제하고

 편집을 했더니 화질이 영 안 좋아 여러번 시도하다

원본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완죤 미니스컽에 그저 놀랄따름 입니다.

북한에 관한 최근소식과 최근에 나온 10여년 전에나온

"이제는 말 할 수 있다"의 특종을 함께 묶어 올립니다.

 

 

 

 

 

 

 

 

 

 

김정일의 妻弟 고영숙 부부,

미국으로 망명 秘話

 



 

 

   

 

[특종]

 

 

 

 

 

 

 

 

“장성택 집권하면 지금보다 잘 텐데”

 

요즘 북 주민들 수군

 

 

 

 

북한에서 요즘 뜻밖에 정권 교체설이 나돈다.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은을 밀어낸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새벽 평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무역 일꾼 김모씨와

통화를 했다. 북한의 청진·함흥·혜산 같은 곳에서

집단 총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국내에 전해 준 며칠 뒤다.

 

 

그에게 “장성택의 권력이 커지느냐”고 묻자 “지금 김정은보다

장성택이 정권을 잡으면 훨씬 생활이 나아질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장성택은 머리가 좋고 ‘령도력’이 뛰어나며

그를 싫다는 간부들이 없을 정도로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 “김정일 때는 감히 입 밖에도 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린 놈이 너무 철없이 놀기 때문에 이러다가는

나라를 말아먹을 것 같다’고 수군거리고 있다”며

 “심지어 ‘리조 오백 년(세습 정권을 비꼬는 말)’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도 있다.

로병(김정일 측근 원로)들도 도리머리를 젓는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지난 10월 말 해외 출장 중 만난

북한 당 간부 황모씨의 발언과도 맥락이 같았다.

그는 “간부들이나 인민들에게 장성택이 정치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며 “김정은이 장성택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측근 가운데 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 김정은은 장성택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관계나 중국과의 관계도

장성택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장성택은 김정일이 뇌출혈로 쓰러진 몇 개월 사이 자기 측근들로 세력을 꾸려 놓았으니 관계가 악화될수록 김정은을 밀어내기가 좋다”고 전망하면서 “장성택이 이미 당의 사법기관을 총괄하는 행정부장을 지냈고, 중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부부장을 거쳐 이번에는 군을 통솔하는 대장 군사칭호를 받은데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맡아 모든 권력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이유를 묻자 그는

 “조선(북한) 하고 남조선의 관계가 예전에는 그나마 유지됐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 의견(불만)들이 많다”며

 “장성택은 친중파여서 정권을 잡으면 중국이 도와 줄 것이고 경제나 인민생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남조선과의 관계도 원활해지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또 “장성택은 김정일이 생존해 있을 때 후계자로 김정남을 지목하고 꾸준히 건의했다”면서 “그런데 당시 당 간부들 가운데는 김정남이 정치를 할 포제(스타일)가 못 되니 자기(장성택)가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려고 하는 것이란 말이 돌았다”고 말했다.

 

함경북도에 살고 있는 박모씨는 “또다시 말뚝(총살형)에 세우고 백성들 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한때는 남조선하고 사이가 좋아져서 기대가 컸는데 그것도 물 건너가고 이젠 위에서 하는 말은 다 거짓이라고 신물 낸다”며 “핵이요, 미싸일(미사일)이요 하면서 떠들지 말고 그 돈으로 쌀이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결같이 말한다”고 전했다.

 

 

또 “백성들도 장성택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김씨보다야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다. 하긴 우리야 누가 되든 잘 먹고 잘살게만 해주면 그만이다. 옛날처럼 충성심이나 그런 거 가지고 떠드는 사람은

바보 취급 받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NK지식인연대의 김흥광 대표는 장성택의 부상 가능성에 대해

“그가 숨은 실세로 자리매김해 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김씨 세습으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과반을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며 또 항일투사 가계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며

“정말 노련한 사람이라면 정권 야욕이 없음을 보여야 하므로

김정일의 3년상까지는 기다리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당과 군이 장성택을 추앙하고 있어 시간이 예상과 다르게

빨리 올 수 있다”며 “현실주의자이며 실리주의자인

장성택이 정권을 잡으면 남북 관계는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오상민씨도 “장성택이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김정일과도 매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기쁨조를 만들어 낸 것도 바로 장성택의 아이디어”라며 “장성택은 착한 역, 김정일은 악역을 하도록 뒤에서 조종한 것도

바로 장성택 본인”이라고 말했다. 

 

 

 

 

金正日의 妻弟 고영숙 부부,

 

미국으로 망명,

 

중대 提報 !

   

   
● 고영숙은 金正日의 愛妻 高英姬의 여동생. 1998년 5월 스위스 거쳐 망명, 金正日의 스위스, 런던 등 해외 비자금에 대해 정보제공. 미국 정부, 뉴욕 證市에 투자된 金正日 비자금 동결. 고영숙 남편은 미국 측에 金正日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기도
●「金正日의 요리인」 후지모토 겐지 증언: 『金正日 부부와 잘 어울리던 고영숙 부부 가족이 1998년 이후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우리 정부 인사도 남편 朴씨 면담. 망명 이유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 살해될까 두려웠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장〈mongol@chosun.com〉
禹 鍾 昌 月刊朝鮮 부장대우〈woojc@chosun.com〉
미국 정부, 신분 확인 후 망명 허가

金正日의 愛妻 高英姬는 북송 재일교포 출신의 무용수였다.

 

 

  金正日의 愛妻 高英姬(50)의 여동생 고영숙(45)과 그의 남편(朴모·40代 후반)이 1998년 5월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金正日의 처제인 고영숙 부부는 망명 후 미국 정보기관에 金正日의 해외 비자금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이 부부로부터 金正日이 뉴욕과 런던의 주식시장 및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뉴욕 시장에 투자한 자금을 동결시켜 버렸다고 한다. 本誌는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고영숙 관련 첩보를 근거로 미국·일본·한국의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여 사실임을 확인했다.
 
  망명 당시 미국 국무부에 근무했던 한 高官에 따르면 고영숙 부부는 스위스에서 생활하던 중 스위스 주재 미국대사관을 통해서 망명을 신청했다고 한다. 미국 당국에서는 이 여인이 과연 高英姬의 여동생인지 확인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망명신청을 받아들이고 미국 정부의 보호下에 두고 신문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런 경우 망명자가 가져올 정보를 기준으로 하여 망명허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고영숙은 망명 동기에 대해서 『金正日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것이 많아 그 때문에 살해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고영숙의 남편 朴모씨의 신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스위스는 金正日이 40억 달러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예치하고 있는 곳이고, 별장이 있어 金正日의 친족들이 유학도 하고 유람도 하는 근거지이다. 스위스 정부도 고객인 金正日의 가족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정보기관에서 가족들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스위스 보안당국이 적극 저지한다는 것이다.
 
 
 
  후지모토 겐지: 『갑자기 여동생 부부가 보이지 않았다』
 
  5년 전 고영숙의 부부와 면담한 한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고영숙의 남편인 朴씨는 40代 후반의 아주 세련되고 다소 거만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朴씨는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이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다. 내가 나서서 그를 미국으로 망명하도록 주선할 용의가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두 부부는 지금 모 아시아 국가 사람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다.
 
  月刊朝鮮 金容三 기자는 지난 8월12일 일본에 가서 「金正日의 요리인」이란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씨를 만났다. 金正日 전속 요리사였던 그는 아주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고영희의 여동생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金正日-高英姬 부부와 자주 식사를 하고 놀았다. 이 여동생의 아들은 金正日과 고영희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 김정운과 친하여 농구도 함께 하곤 했다. 그런데 1996년에 내가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1998년 6월에 돌아가니 고영희의 여동생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고영숙 부부가 망명을 결심할 때는 사전 준비를 치밀하게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무기는 金正日과 관련된 정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가 이들이 가져온 金正日의 해외 자금 자료를 근거로 하여 뉴욕 證市에 들어온 金正日 비자금을 동결했다면 그들이 제공한 것은 서류로 된 구체적인 정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1986년에 申相玉·崔銀姬 부부가 탈출할 때 金日成·金正日과 나눈 대화 녹음 테이프를 가져와 미국 CIA에 제공한 것을 연상시킨다. 미국 정부는 고영숙 부부를 통해서 金正日 비자금 관리에 관계하는 변호사들의 명단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1998년 이후부터 자신 있게 金正日이 스위스 등 해외에 숨겨 놓은 비자금은 40억 달러 이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판단을 내리도록 만든 데도 고영숙 부부의 提報가 일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영숙 부부는 당시 金正日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미국 정부도 金正日에게 망명을 권유하는 공작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망명 후보지는 러시아와 스위스였다고 한다. 
  
  
  
위기에 몰렸던 1995~1998년의 金正日:

측근에서 모반자와 탈출자가 속출
  
    돌이켜 보면 金正日은 1994년 7월의 金日成 死後 위기에 몰렸던 것이 확실하다. 金正日의 요리인 후지모토씨에 따르면 金正日은 이즈음 자기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곁에 권총을 두고 잤다고 한다. 이를 보고 高英姬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라면서 치워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씨는 1995년 12월 말 金正日이 식사 자리에 초대한 군장성들에게 『그자들을 쏘았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아마도 반란을 모의한 장교들에 대한 사살확인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미국과 한국 정보기관이 확인한 反金正日 모의도 1995~1998년에 집중되어 있다.
 
  ●1992년 말~1993년 초에 소련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장교 11명이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되었다.
 
  ●1995년 초 청진 주둔 제6군단 장교들이 국가보위부 간부들과 손잡고 金正日 제거 계획을 추진하던 중 적발되었다.
 
  ●1995년 이래 매년 평균 300명 정도의 反金正日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1997년 11월 노동당 대외정보 조사부 부장 권희경이 러시아 KGB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되고 조사부 내에 큰 숙청이 있었다. 이해에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농업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1998년 초 對南공작기관의 하나인 노동당 작전부장 吳克烈 대장의 아들이 反金正日 모의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해 말 국가보위부 제1부부장으로서 실질적인 부장 역할을 수행하던 김용영이 체제불만의 혐의로 조사받기 직전에 자살했다.
 
  ●1998년 말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성을 담당하는 당비서 桂應泰의 사위는 金正日 제거 계획을 주동했다고 하여 잡혀 죽었다.
 
  이 무렵 金正日은 주변 사람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이 살아 계셨을 때가 참 좋았다. 그분이 안 계신 지금 나는 너무 힘들다. 누가 나의 적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나는 가끔 악몽을 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측근에서 모반자가 생기던 이 무렵 金正日을 버리고 탈출하는 측근 인사들도 나타난다. 1996년 초 金正日의 前妻 성혜림과 그녀의 언니 성혜랑 일가가 모스크바에서 스위스로 탈출했다가 성혜림은 변심하여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1997년 초엔 黃長燁·金德弘씨가 탈출했고 그 1년 뒤 고영숙 부부가 탈출한 것이다. 金正日의 최측근이었던 이들의 탈출에는 『이제 金正日 정권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感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黃長燁씨는 한국에 와서 『金正日이 수년 내에 무너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 정부도 이즈음 金正日 붕괴에 따른 시나리오를 써 놓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에선 『金正日이 무너져 혼란이 일어나면 한국군이 들어가 질서를 잡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결론까지 내려 둔 상태였다고 한다. 
  

 

 

 

 


  
  
  金大中이 金正日에게 불법자금 대 주고

金正日 제거 계획도 중단
  

  이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것 같았던 金正日 정권에게 숨통을 틔어 준 것은 1998년 2월에 등장한 金大中 정권이었다. 金大中 정권은 金正日 정권에게 막대한 달러와 식량과 뇌물과 물자를 대 주었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우리 군과 국정원이 오랫동안 추진해 왔던 金正日 제거 및 정권붕괴 작전을 중지시킨 것이다. 만약 李會昌 후보가 당선되어 對北 압박정책을 계속하였더라면 지금쯤 金正日은 제거되든지 망명하였을 것이고 북한 동포들은 구출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 궁금증이 생긴다. 高英姬의 여동생이 미국으로 달아났는데도 고영희는 변함없이 金正日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듣고 著書를 읽어 보면 짐작 가는 바가 있다. 金正日은 이 제주도 출신의 北送 재일교포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高英姬를 안 뒤부터 金正日의 외도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에서 생활하여 일본식 예절이 몸에 밴 여인은 金正日이 출장을 나가면 꼭 따라다닌다고 한다. 작년 8월부터 북한군에선 그녀를 「존경하는 어머님」이라 부르면서 우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인민군 출판사에서 펴낸 교육자료의 제목은 「존경하는 어머님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이시다」이다.
 
  후지모토 겐지씨도 고영희에 대해서 아주 좋은 평을 하고 있다. 이 요리사는 1998년에 北京으로 출장 나와 일본 경찰의 간부에게 국제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이 전화가 북한 정보기관에 도청되었다. 이 때문에 가택연금에 놓이기도 했던 후지모토씨는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하고 낙담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 7월 어느 날 수영장에 나온 고영희가 후지모토씨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요리사의 高英姬 호평
  
  『그동안 한번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그동안 장군님을 위하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어 정말 고마웠습니다. 후지모토씨는 스포츠도 잘하고 색소폰 연주도 잘하고 정말 우리를 즐겁게 해 주어서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5000달러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高英姬는 『후지모토씨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라고 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요. 일년에 한번쯤은 일본에 가서 딸과 형님도 만나 보고 술도 한잔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장군님에게 말씀드려 놓을게요』
 
  며칠 뒤 金正日은 후지모토씨를 불렀다.
 
  『일본에 다녀오게. 여권도 재신청하고. 참치도 좀 사 오고 말이야. 2주간이야.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화해선 안 돼』
 
  후지모토씨는 2년2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생각도 했으나 그때 高英姬가 떠오르더라고 한다.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고맙게 해 준 高英姬가 곤경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있다가 1년 뒤 탈출하게 되었다. 후지모토씨는 자신이 그전에 일본에 일시 귀국하여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을 때 金正日이 부하들에게 『일본에서 후지모토를 찾아내 죽여 버려!』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고영희가 남편을 말려 살아날 수 있었는데 이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는 것이다.
 
  후지모토의 증언과 著書를 통해 보면 高英姬의 여동생이 비록 미국으로 탈출했다고 하더라도 金正日의 妻에 대한 사랑과 신뢰엔 금이 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정보파일 / 高英姬와 고영숙]
  
  고영숙은 스위스에서 언니 자녀를 돌보며 살기도
  
  
  北送 재일교포 출신 집안
  
  高英姬는 1953년생으로 올해 쉰이고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은 다섯 살이 아래다. 고영희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 고태문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고영희는 북한의 만수대 예술단이 1973년 일본에서 공연을 가질 때 단원으로 참가,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 일본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취재진에 따르면 고영희의 아버지 고태문은 일본의 유명한 유도 선수인데, 이북 출신의 일본 프로 레슬러 力道山과 친했다고 한다. 고태문은 力道山의 도움으로 북한을 방문, 金日成 앞에서 유도 시범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태문은 1960년대 초, 전 가족과 함께 北送船(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갔다. 고영희 一家의 일본 내 최종 거주지는 오사카이다.
 
  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원 시절인 1974년 무렵 金正日의 눈에 띄었다. 金正日은 자신의 별장 중 하나인 창광산 관저(평양 소재)에 고영희를 들여앉혔다. 안기부 출신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고영희에 대한 金正日의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모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金正日이 고영희를 사귈 무렵, 金正日 관저(85호 관저)에 살았던 妻는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이다. 북한의 對南 테러 전문부서인 사회문화부 소속의 한 공작원은 金正日과 성혜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모의 영화배우 성혜림은 1960년대 후반 북한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성혜림은 越北 작가 이기영의 장남과 혼인한 유부녀였다. 유부녀 성혜림과 金正日의 밀회를 주선한 사람이 할머니 공작원으로 널리 알려진 정경희 대외연락부 부장이다. 정경희는 영화狂인 金正日을 성혜림이 권총 사격하는 촬영장으로 안내하는 등,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 功을 인정받아 정경희는 오랜 기간 대외연락부 부장을 지냈다』 
  
  
  
  고영희, 파리에서 유방암 치료
  
  성혜림은 1971년, 金正日과의 사이에 아들 金正男을 낳았다. 하지만 金正日이 고영희를 총애하면서 신경쇠약 증세가 악화돼 1974년부터 병 치료를 한다면서 언니 성혜랑 식구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나가 살았다. 성혜림은 언니 성혜랑이 1996년 모스크바를 탈출, 서방으로 망명할 때 스위스까지 따라 나갔으나 그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보호 속에 있으며, 성혜림은 작년 7월 모스크바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성혜림이 평양을 떠난 1974년 이후 고영희는 金正日의 실질적인 처가 되었다. 성혜림은 金正日보다 다섯 살 많은 연상의 여자인 데 비해 고영희는 金正日(1942년생)보다 열한 살 어리다.
 
  외부에 공개된 金正日의 여자는 세 명이다. 성혜림이 첫 번째 여자이고, 두 번째는 함경북도 안전국에서 전화교환수로 일하다 중앙당 조직국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숙(53)이다. 金正日과 김영숙 사이에는 아들이 없고 설송이라는 딸이 하나 있다. 고영희는 金正日의 세 번째 여자다. 고영희는 1981년에 아들 김정철을, 1983년에는 김정운이란 둘째 아들을 낳았다. 후지모토씨의 증언에 따르면 요정(또는 여정)이란 딸이 있다.
 
  고영희는 肝이 나빠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았고, 1990년대 초반에는 유방에 종양이 발견돼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았다. 프랑스에는 金正日 본인을 비롯, 그의 가족과 측근들만 치료받는 전속 병원이 있다. 인민무력부장 吳振宇도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에서 고영희는 1994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고영희가 신병 치료차 프랑스에 갈 때는 金正日의 전용기를 이용, 北京으로 간 뒤 스위스를 경유해 프랑스로 들어갔다. 외국에 드나들 때 고영희는 영국, 프랑스, 브라질 등 3개국 여권을 사용했다. 이 중 브라질 여권은 북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 김현구가 브라질 투자 이민 형식을 취하여 발급받은 것이며 영국 여권과 프랑스 여권은 위조여권이라고 한다.
 
  미국과 한국 정보기관은 金正日에게는 이 세 명의 여자 외에 다수의 愛妾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愛妾 중의 한 명이 마카오 부호들의 빌라촌에 거주하는 정일선(여권에 기재된 이름인데 실명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이다. 정일선은 1975년생이다. 金正日과 정일선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 아들은 마카오에서 정일선과 함께 살고 있다.
 
 
 
  金正日 소생들은 모두 해외 유학
  
  金正日의 소생이 모두 몇 명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서른세 살인 金正男이 장남이고, 그 아래로 10여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거의가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유학 중이라고 한다. 이들은 현지에서 별장 스타일의 호화 주택을 구입해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다른 관계로 떨어져 산다. 金正日 일가의 행동반경은 舊공산권 국가와 비자금이 많이 투자된 나라로 한정되어 있다. 이 나라들의 정보기관과 금융기관이 뒤를 보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金正日 요리인 후지모토씨의 著書에 따르면 고영희는 일본에 몰래 들어와 놀러간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성혜림의 소생 김정남은 1980년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金正日은 김정남을 위해서 제네바 교외 레만 호숫가의 고급 주택가에 있는 빌라 한 채를 구입했다. 대지 2500평에 건평이 500평쯤 되는 단독주택이었다. 1980년 당시 200만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이 빌라에는 金正男의 수행원과 경호원, 전속 요리사, 그리고 정남이를 보살피는 아주머니 두 명이 거주했다. 이 빌라는 김정남의 교육이 끝난 후에도 팔지 않고 성혜림·성혜랑 一家가 스위스를 여행할 때 숙소로 이용되었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 一家가 스위스에 도착한 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머문 곳이 이 별장이다. 이 별장의 내부 사진은 성혜랑 일가 서방 탈출 후 朝鮮日報를 통해 공개되었다. 
  
  
  
 
고영숙, 언니 자식들의 스위스 생활 뒷바라지

  
  고영희의 소생 김정철과 김정운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들이 살던 집은 2층짜리 호화 빌라인데 베른에서 약 4~5km 떨어진 호숫가에 있다. 김정철은 베른 국제학교 재학 중 일본 언론의 카메라에 잡힌 적도 있다.
 
  김정철·김정운 형제가 거주한 호화 빌라의 소유주는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 외교관 「정일선」인데,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이 해외에서 북한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할 때

사용하는 가명이 바로 「정일선」이라고 한다

(마카오에 사는 金正日의 애첩 이름도 정일선이다).
 
  이로 미뤄 고영숙 부부는 미국 망명 전 스위스로 나와 언니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위스 등지에 유학중인 金正日 소생들은 스위스 은행에 은닉 중인, 약 40억 달러에 이르는 金正日 비자금으로 생활했다. 고영숙 부부가 金正日 비자금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김정철과 김정운은 방학 때마다 金正日이 보낸 특별 항공기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이들이 평양에 갈 때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이자 金正日의 비자금 관리자인 이철이

 동행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金正日의 자식들에 대해 정통한 한 소식통은 『김정철은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체격인데 잔병치레가 많았다. 김정철은 미국 프로농구에 관심이 많은 스포츠맨이고, 동생 김정운은 머리가 뛰어나며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 金正日은 김정철보다는 김정운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金正日이 고영희 소생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택한다면 김정운이 발탁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후지모토씨도 김정남은 평양의 權府에선 잊혀진 인물이고 김정철도 너무 얌전하다는 金正日의 부정적 시각도 있고 해서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金正日이 자기로서 북한정권은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계체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분석도 한다. 
  
  
  
  뉴욕 證市 동결 자금
  
  미국 정부가 고영숙 부부의 提報에 따라 동결시켰다는 뉴욕 證市에 투자된 金正日의 돈과 관련,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공항에서 체포되기 전까지 金正男은 서방 세계를 거리낌없이 돌아다녔다. 일본에서 체포되기 1년 전, 그러니까 2001년에 김정남은 미국에 동결돼 있는 아버지 돈 약 5500만 달러를 찾기 위해 제3국인으로 위장, 미국에 입국했다. 물론 이 돈을 찾아가지는 못했다』
 
  북한을 상대로 여러 번 첩보전을 치른 옛 안기부 戰士들은 金正日의 망명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한 관계자는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 독일의 히틀러 등 많은 독재자들은 거의 자살로 生을 마감했다』며 金正日도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다른 관계자는 『金正日의 처형 성혜랑 일가와 金正日의 처제 고영숙 일가가 미국, 프랑스 등 서방 세계에서 살고 있고, 현재 후계자 구도에서 배제된 金正日의 장남 김정남까지 만일 서방 세계로 탈출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金正日로서도 서방으로의 망명을 고려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고 말했다.
 
  金泳三 정부 시절 안기부 고위 간부를 지낸 한 사람은 『통일을 위한 여러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金正日 암살이 그중의 하나였다』며 『金正日이 승마할 때 혹은 지방 시찰할 때 암살하기 위해 金正日 경호원 매수 작전을 벌이다 중단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金正日 前妻 성혜림 언니 일가의 서방 탈출을 계기로 시작된 黃長燁 비서 망명, 최세웅(金正日의 런던 비자금 관리자) 망명 등 북한 고위층의 북한 탈출 행렬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끝을 보았다.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은 붕괴 직전까지 갔던 북한 金正日 체제를 회생시키고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연장시켜 준 반민족적 행위가 되고 말았다.
 
  최근 金正日의 처지가 다시 1995~1998년 상태로 돌아간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는 최근 북한 주민들로부터 라디오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엇이 무서운지 전국의 이곳저곳을 계속 돌아다닌다. 평양에 머물러 있는 기간은 한 달에 일주일이 안 될 정도라고 한다. 金正日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저렇게 해서 어떻게 통치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金大中의 반역적 햇볕정책이 파탄 난 지금 金正日은 또다시 살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이 된 모양이다.

 

 

 

 

 

 

 

모란봉악단

 

 

 

 

 

 

 

 

 

 

 

 

 

 

 
 
 
 
 
 
 
 
 
 
 
 
 
 
 
 
 
편집과음악=씨밀래
알부출처=비전통신. 웃음과 즐거움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