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한국의 문화

아리랑-아리랑 (續)-필독

까까마까 2014. 4. 17. 10:58

 

 

 

 

 

 

 

아리랑의 역사적 고찰을 이토록 정열적으로 찾아낸 자료는 나 같이 글속이

짧은 사람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특히 아리랑이 하나님의 노래로 연결 지어짐은

잔잔한 은가비로 다가옵니다. 중국이 먼저 아리랑을 국가 문화재로 등재 했다니 헐..

덧 붙쳐(?) 우리나라 꽃 무궁화도 국회를 통과한지 좀 됬으니

빨리 정착이 됬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다 읽으신 후 화려한 외모와 경력의 한국의 팝페라 구룹 

VIVA VOCE의 아리랑을 재생해서 들어보세요.  

 

 

 

아리랑-아리랑 (續)-필독

 

 

 

 

 

우리 한민족은 괴로울 때에도 슬플 때에도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즐거울 때에도 행복할 때에도 아리랑(亞里郞) 노래를 부른다.

하느님(上帝)의 노래를 부른다

 

 

 아리랑

 

대방(大方) 일명(日明) 간태궁(艮兌宮).

대지 위의 밝은 태양은 간태(艮兌)궁을 밝히리라.

 

간방(艮方)은 한국(韓國)이고, 태방(兌方)은 미국(美國)이다.

미래의 새로운 문명(文明)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한국(韓國)미국(美國)이다.


 

결국,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은 곧 통일(統一) 될 것이며,

바로 통일된 그 한국(韓國) 그리고 미국(美國)이 합덕(合德)하여

앞으로의 세계 문명(文明)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가수 조용필(趙容弼)은 ‘꿈의 아리랑(亞里郞)’이라는 노래에서

아리랑(亞里郞) 고개는 우리의 슬픈 눈물이지만,

아리랑(亞里郞) 고개는 ‘희망의 고개’ 라고 노래했다.


 

 아리랑(亞里郞)은 언제 어떤 경로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 한민족의 애국가(愛國歌)처럼 부르는 노래이다.

아리랑은 가장 오래도록 살아 전해 온 끈질긴 지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은 아리랑을 ‘Korean Folk Song’으로

그리고 한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장에서

조수미가 부른 노래도 아리랑이다.

 

그리고 2002년부터 세계 구전(口傳) 무형 유산의 보존 및 전승을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UNESCO)에 신설된 상(賞)의 이름이 바로 ‘아리랑 상(Arirang prize)’이니,

이미 아리랑은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1991년 일본 지바(千葉)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 대회에서

‘아리랑(亞里郞)’이 남북 단일팀의 단가(團歌)가 되어

남북 화합과 협력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된 후,

 

 

2000년 시드니(Sydney)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한반도(韓半島) 기(旗)와 아리랑(亞里郞) 노래가 통일 한국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은 남북한 양쪽과 세계 127개국에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亞里郞)’ 이상의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우리 한(韓) 민족은 만년(10,000년)의 역사를 지닌

아시아의 종가(宗家)집 민족이며, 배달(倍達) 민족이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배달(倍達) 민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었는데,

요즘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부여. 옥저. 동예. 낙랑국.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우리 한(韓) 민족은 옛날부터 이(夷)족 이라고 였으며,

큰 활을 잘 사용하는 민족(民族)이라는 뜻이다.

 동이(東夷)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랑캐 이(夷)라고 하는 것은 중국 명(明)나라 때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공자(孔子) 또한 늙어서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고,

이(夷)족 다음으로 많이 기록된 이름은 구려(句麗)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한때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國號)도 사용했었다.

 

원래, 제사(祭祀) 문화는 우리 배달(倍達) 민족이 중국 한(漢) 민족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리고,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中國)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임금(하夏나라). 탕임금(은殷나라). 문왕(주周나라). 무왕(주周왕조).

강태공(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복희(太昊伏羲).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堯)임금. 순(舜)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 민족이었다.

 

중국의 상고사(上古史)는 동이족(東夷族)의 역사였고,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족이 북상하면서 춘추(春秋) 전국(全國)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진(秦)나라 진시황의 통일 중국(中國)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元)나라는 단군(檀君) 4세 오사구의 아우 오사달의 후손인 홀필열(忽必烈)이 건국하였으며,

 (明)나라는 주원장(朱元璋)이 건설하였는데,

그는 바로 함경도 함흥(咸興) 사람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다.

 

(淸)나라는 신라(新羅) 경순왕의 후손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

그 후손이 다시 건국한 것이다.

 

金)나라는 신라(新羅) 말 경순왕의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건국한 나라이며

김(金)씨가 세운 나라여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 신라인들의 부흥의지는

만주대륙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淸)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누루하치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愛新覺羅)라는 성(性)은 원래 김(金)씨에게서 분가(分家)해 나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愛新覺羅)라는 성(性)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

애신(愛新)각라(覺羅), 즉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청구(靑丘) 배달(倍達)(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靑丘) 배달(倍達)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文化)이다.

 

그 다음 고조선(古朝鮮)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신화의 형태로 이야기해야 알아듣는 그런 시대였다.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의 8명 중에

우리 배달(倍達)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의 역사를 모두 다 빼앗아 갔다.

러나,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한민족의 하느님을 뜻하는 언어 즉 아리랑(亞里郞) 노래이다.


 

우리 한민족은 괴로울 때에도 슬플 때에도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즐거울 때에도 행복할 때에도 아리랑(亞里郞) 노래를 부른다.

하느님(上帝)의 노래를 부른다.

 

아리랑(亞里郞) 노래는 한자(漢字)가 생기기 전(前)의

배달국(倍達國, B.C3,897-2,333) 시절부터 불러져 왔으며,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한민족은 지구상 어디에 가서 살아도 하느님(上帝)의 노래,

아리랑(亞里郞) 노래을 부른다.

 

 

 

중국이 먼저 국가 문화재로 등재한 아리랑

                                                                   

 

지난(2004년 현재) 21일 중국 국무원이 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했다.

이는 2005년 조선족 '농악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때부터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문광부가 아리랑을 '한국의 100대 상징'의 하나로 선정하고

2008년부터 아리랑세계화 사업팀을 운영하며,

국가브랜드사업과 연동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분명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아리랑에 대한 해외에서의 위협이 없진 않았다.

첫 사례는 1976년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앨범 '아리랑 미라클(Arirang Miracle)'을 발매하며

 

'동양의 연가(Oriental love song)'라고 표기했다가 한 교포의 항의로

국내 유입 음반에서는 '한국 전통음악(Korea traditional music)'으로 고쳐 발매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김치를 '기무치'로 브랜드화한다며 논란을 일으키던 시기에

한 우익단체 사이트에서 아리랑을 '쇼군의 노래'로 둔갑시킨 바 있어,

이 역시 항의로 삭제시켰다.

 

그런데 이번 중국의 사태는 이런 항의로 수정될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일견 '우리 동포들의 아리랑을 등재한 것이니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번 지정이 동북공정의 일환이고

이에 대해 북한과는 일정 부분 논의를 했으리라는 점과

특히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예비작업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하지가 않다.

 

특히 이런 가능성이 이미 5년 전부터 제기되어 왔음에도

우리가 이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문제다.

제도적 등재에서 중국에 선수를 빼앗긴 지금,

 우선 이 책임을 문화단체와 공유하며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해 국가브랜드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책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다음 사항을 제안한다.

첫째, 정부는 1998년 유네스코가 시행하다가 폐지시킨

'아리랑상'의 취지를 살려 한국이 국제사회에 공헌할

새 기금제도를 제정, 시행하길 바란다.

 

둘째, 문화재청은 기존 제도와는 다른 차원의 가칭

'아리랑명창제도'를 시행 바란다.

 

셋째, 세계에 알려진 아리랑의 '보편성'을 감안해

특정 지역의 아리랑이 아닌, 포괄적인 장르 개념의 '아리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하기 바란다.

 

넷째, 문광부는 현 아리랑세계화사업을 확대하거나

아리랑을 포함한 전통문화 전반의 세계화사업을 제도화하길 바란다.                                                                     

 

 

 

 

             김연갑 (사)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방금 한국의 조선일보 인터넷 싸이트에서 읽은 기사 한 토막입니다.
 혹시 아직 보시지 못한 분께 인사겸 메일을 올려 드립니다.
 

 
일본 시골 여관에 65년째 걸린 사진 한 장

 

  • 최길시 前 성남 분당중 교장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여행을 다녀왔다.

 한결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

 인연처럼 만난 사연 하나가 가슴에 애련하다. 

 

 

 

지란(知覽)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여관 복도에

 65년 동안 걸려 있는 한국사람 사진 한 장.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沈壽官)' 도요지와 도자기를 보는 것이었다.

 일정에 시간 여유가 있어 관광안내소에 상담을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란이란 곳을 추천해 주기에,

 그 자리에서 관광지도 한쪽 구석 맨 위에 올라 있는

 도미야여관(富屋旅館)이란 곳에 전화로 예약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한 지란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 여관부터 찾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인 손님이

 길이나 헤매지 않을까 문밖까지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부부 둘 밖에 없는, 오래된 조그만 여관이었는데,

 현관에서부터 특공대(特攻隊)와 '호타루(반딧불이)'에 관한 액자와

 문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오래전, 한 한국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안 주인 도리하마 하쓰요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악명 높은 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도리하나 도메)가 이 집에서 식당(食堂)을 하고 있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한국명 탁경현)라는 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도 면회 오는 이가 없었던 그와

모자(母子)처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는 출격하기 전날, 작별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한 서린 목소리로….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burbuck@chosun.com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녀가 그를 위로하자,
 "만일 제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반딧불이 되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출격했고, 태평양에 몸을 던진 그날 밤,
 그가 앉아 있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이후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러 해 전에 일본에서 '반딧불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계속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혹시라도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유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사진만 저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유족을 만나든지, 그의 고국으로 사진이라도 전해주고프다며….

 지금은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자기와 딸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하쓰요씨는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며

 아린 얘기들을 끊임없이 가슴에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들 사이에

 빛바랜 낡은 그 사진 한 장이 애처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을 그 사진이, 이국(異國)의 시골 한구석,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피의 한국사람들조차 발길 하지 않는

 이 조그맣고 오래된 여관 벽에 65년이나 걸려 있어야 하다니….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희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가슴이 미어졌다.역사의 구렁텅이에서

 '가미카제'라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나갔던 그를 

 누구는 친일파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울며 마지막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래였을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묻고,

 그 영혼조차 긴 세월을 이국의 구천(九泉)에서 떠돌아야 했으니….

 

암울했던 그 시대에 어찌 억울한 영혼이 그 하나뿐이랴!

 울음을 삼키려 고개 숙이고 부른 그의 아리랑이

오늘도 나의 가슴을 울린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